2013년의 진상 기념글
나는 초등학교 5,6학년 때 부터 게임 개발을 시작했다. 창원 지역 초등학생들에게 나눠준 지역 PC통신망 무료 ID를 이용해서 플레이 할 수 있었던 머드 게임에 미쳐 오픈 소스 머드 게임 코드를 고치면서 C 언어 공부를 시작하였고, 2,3년 후 리듬 게임에 빠지고부터는 리듬 게임을 만들기 위해서 DirectX나 Win32 API 등을 만지기 시작했다. 아직 경력이 길지도 않고 대단한 성과를 이루지도 못했지만 겜블 게임, MMORPG, 웹 게임, 모바일 게임을 개발해왔으며, 인디 게임 개발에 참여하고 그러다 만난 친구들과 스타트 업 게임 회사를 만들어 일하기도 했다. 올해도 회사를 다니면서 혼자서 취미로 만든 미니 게임 3개를 공개했다. 게임 개발은 즐거운 취미이자 일이었고 이 일이 나의 천직이라는 것을 한번도 의심해본 적이 없었다. 그런데 지금 다니는 회사에 입사한지 1년도 안되서 생애 처음으로 '게임을 만들기 싫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얼마 후 12월 20일, 나는 회사 송년 기념 행사에서 최우수 사원으로 선정 되었다. 수상 이유로 회사에서 숙식을 마다하지 않고 일했다는 것이 언급되자 눌러놨던 화가 터져 나와서 MC가 건내 준 마이크에 있는 대로 내 감정을 쏟아내고 내려와버렸다.
사실 이전 회사를 그만 둘 즈음에 꽤 많은 이직 제의가 들어왔었다. 그 중 지금 다니는 회사에 가기로 정한 것은 이 회사에서 그 동안 내가 경험하지 못한 어떤 것을 얻을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 때문이었다. 다양한 프로젝트에 참여해왔지만 상업적으로 크게 성공 한 프로젝트에는 한번도 참여 한 적이 없었고 잘 되는 회사와 침몰하는 회사의 차이가 뭔지 겪어보면서 확인을 해보고 싶었다. 마음 맞는 친구들과 소규모 스튜디오를 차리고 싶다는 생각도 있으나 무작정 일을 벌이기에는 내가 정말 만들고 싶은 게임에 대한 확신도 부족했고, 줄 수 있는 것 없이 다른 사람들을 끌어들이고 싶지도 않았다. 고민 끝에 입사를 결정했으나 그 후 실제로 일어난 일들은 기대와 크게 달랐다. 입사 후 8개월 가까운 시간 동안 프로젝트는 방향을 찾지 못한 채 표류했고, 그 와중에도 업무는 쏟아졌다. 파트장으로서 개인적인 신념 상 남들이 초과 근무를 해야만 하도록 일을 시키기는 정말 싫어서 가능하면 남들을 보내고 내가 밤을 새가면서 일했다. 시간이 지나고 게임의 출시 일자는 개발 진전도와 상관 없이 사업적인 계산에 의하여 결정되었다. 이후에는 나 혼자 어떻게 해보려고 해도 감당하기 힘들 정도의 업무가 쏟아졌고 결국 파트 전체가 지난 2달 가량 출시를 위한 끔찍한 시간을 보내야만 했다.
어쨌건 게임은 출시되었지만 런칭 직후에 느낀 감정은 후련함이나 보람과는 거리가 멀었다. 정확히 표현하기는 어렵지만 자괴감에 가까운 느낌을 받았던 것 같다. 급한 불은 껐지만 아직도 게임의 기술적 완성도는 떨어지는 상태다. 일정에 쫓기다보니 제대로 챙기지 못하고 넘어갔던 문제들도 있고, 알면서도 시간 대비 효과를 따지다가 결국 포기한 문제도 많다. 한 동안 구글 플레이 스토어 리뷰나 카페에 올라오는 글들 모두 눈을 뜨고 볼 수 없는 수준이었다. 아직 아는 개발자들에게 내가 만든 게임이 오픈했다고 해보라고 알리지도 못했다. 다른 사람들이 게임을 해보고 내가 이 정도 밖에 못하는 사람이라고 평가하는게 두렵다. 열심히 일하고 왜 이런 감정을 느껴야하는지 답답하고 앞으로 수습해나가야 할 일들 때문에 막막하기만 하다. 물론 이 곳을 다니면서 많은 것을 얻기도 했다. 원래 개발자에 대한 대우가 좋은 축에 드는 회사이기도 하고, 좋은 기회를 얻어 분에 넘치게 인정을 받으면서 일해왔다. 함께 고생해 온 같은 팀원 분들 모두 실력으로나 인격적으로나 더할 나위 없이 좋은 분들이었고, 온갖 일을 겪으면서 개인적으로도 많은 성장을 했다고 생각한다. 다만 "잘해서"가 아니고 "개같이 일해서" 상을 받는 것, 출시 후 만족감 대신 부끄러움을 느껴야하는 것이 개발자에게 주는 고통을 회사가 알고 있었으면 좋겠다.(알면서 모른 척 하고 있을 수도 있겠지만)
출시 후 약간의 시간 여유가 생기면서 스스로에 대해서 많은 생각을 했다. 죽음에 대한 공포로 오랜 시간 정신과 치료를 받아오면서(http://neverdreamed.tistory.com/entry/Kitchen-Table-Madness 참고!) 스스로를 행복하지 못한 상황에 밀어넣지 말자고 정했던 원칙을 떠올렸다. 앞으로 회사의 방침이 어떻게 달라질지, 회사의 욕망과 나의 행복을 어느 정도 일치 시킬 수 있을지는 두고 볼 일이다만 피폐해진 정신을 수습하여 내년에 하고 싶은 일들과 해야 할 일들을 정리하고 있다. 2014년에는 어디가서 마이크 잡고 진상 부릴 일이 없는 한 해가 되었으면 좋겠다.